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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듀어런스 - 실패인데 위대함
    카테고리 없음 2023. 5. 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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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ckleton's Successful Failure

     

    인듀어런스저자캐롤라인 알렉산더출판뜨인돌출판사발매2003.11.25.

    남극을 탐험하는 새클턴과 동료들의 실제 이야기를 쓴 책입니다.

     

    실화 이지만 영화나 소설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몰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인듀어런스호의 대장으로서 새클턴은 배의 동료들에게 헌신적입니다. 먹을것을 양보하고, 불침번도 서고,,, 동료들 모르게 합니다.

     

    마지막에 구조되었을 때에도 다른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다시 남극으로 떠납니다.

     

    몇 년후 다시 남극으로 떠나 사우스 조지아섬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것 또한 극적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망망대해 바다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없는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일 겁니다.

     

    인듀어런스를 타고는 3번째, 그 이후 사우스 조지아섬에서 죽었을때 4번째, 모두 남극점 정복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모험이 무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엘리펀트섬에서의 배로 오두막을 짓고 지낸 수개월을, 세월이 흘러 배로 지나면서 볼때의 감정을 저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1. 개요[편집]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2]

    출처 입력

    영국 탐험가.

     

    큰 탐험 두 번이 실패로 끝났으나, 그 실패에도 극한의 환경에서 두 번 다 모든 대원들을 살려서 돌아왔기에 최고의 탐험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소년 시절[편집]


    섀클턴은 2남 8녀의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농부였던 섀클턴의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하였기에, 섀클턴은 고향에서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소년 시절 대부분을 보내었다.

     

    이후 1884년 섀클턴은 런던의 시든햄으로 이주했고, 1887년 덜위치 학교에 진학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2.2.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편집]


    섀클턴이 남극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01년이다. 영국은 디스커버리호를 보내 남극을 탐험하도록 했는데, 이때 섀클턴도 참가했다.

     

    제국주의 시대 남극 정복은 나라의 자존심을 건 대결인지라 이 탐험대의 대장은 영국 해군 중령 로버트 스콧이었고, 전문 연구원들을 제외한 일반 탐험대원들은 영국 해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는데 영국 상선대 사관인 섀클턴도 해군 소속인 만큼 이 탐험대에 참가할 수 있었다.

     

    스콧은 섀클턴과 에드워드 윌슨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하지만 얼마 못 가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데리고 간 개 22마리를 모조리 잃고 세 명 모두 설맹 & 동상 & 괴혈병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특히나 섀클턴의 병세가 심각했고, 결국 그는 기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콧의 결정에 따라 본국으로 강제 송환당했다. 나중에 스콧이 쓴 '디스커버리 호 여행기'에서 섀클턴은 변변치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 평가가 과연 합당한지는 스콧과 섀클턴의 행적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3]

     

    첨언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은 나중에 스콧과 함께 남극점 탐험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같이 죽음을 맞았다.

    2.3. 님로드 호의 탐험[편집]


    1907년, 섀클턴은 다시금 남극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탐험대의 대장으로서 참가하여 1909년까지 계속했다.

     

    다만, 영국 탐험대임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맥머도만(灣)은 나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딴지를 거는 바람에 웨일스 만과 에드워드 7세 랜드에 잇달아 상륙을 시도하지만 얼음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맥머도만에 기지를 세웠다.[4]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2.3.1. 성과[편집]


    • 제임스 애덤스가 지휘한 등반대는 남극 최대의 화산인 에러버스 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 산의 높이는 3734m이며, 현재도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 앨리스테어 F. 맥케이가 지휘한 분견대는 남위 72도 25분, 동경 155도 16분에 위치한 자남극점을 정복했다.
    • 과학적인 성과도 컸다. 섀클턴은 남극에서 석탄 조각을 발견했는데, 석탄이란 식물이 땅속에 묻혀서 생기는 것이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극지 기후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지질학의 패러다임을 대륙 이동설로 바꾸어준 증거가 된다. 발견 당시에는 오파츠 취급됐다.
    • 섀클턴이 이끈 본대는 남극점에서 156km 떨어진 지점인 남위 88도 23분까지 도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 기록이었다.

    2.3.2.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편집]


    성과도 컸지만, 섀클턴의 탐험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주산 조랑말과 스노모빌을 투입했는데, 그걸 본 노르웨이 프리드쇼프 난센은 기겁하면서 그를 말리며 "조랑말은 위험합니다! 가 낫소. 그리고 저 설상차는 과연 극지방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 수 있겠소? 개썰매가 나을 거요."라며 충고[5]를 해줬지만 섀클턴은 조랑말을 가지고 남극 탐험을 떠났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섀클턴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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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랑말은 1마리가 하루에 무려 800킬로그램을 끌고갈 수 있는데, 먹이는 하루에 5킬로그램만 주면 된다. 그러면 그 짐으로 먹이도 가져가고 두둑한 먹을 거리와 연료와 의료품이나 생필품을 끌고 갈 수 있다. 스노모빌이 고장나도 문제 없다. 하지만 개는 1마리가 무리를 해도 하루에 겨우 50킬로그램밖에 못 끌뿐더러, 하루에 먹이 750그램이 필요하다. 따라서 짐을 운반하는 데 개보다는 조랑말, 그것도 추위에 강한 만주 지역 말이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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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섀클턴의 판단은 합리적인 듯 보인다.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교통수단의 대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6] 하지만 섀클턴의 탐험대가 가려는 곳은 단지 좀 썰렁한 한랭지역이 아니라 지구 최대의 혹한지인 남극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극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추운 지역인 북쪽에서 말이 아니라 개썰매를 이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술할 이유들 때문에 말보다 개가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의 그 유명한 역참 제도도 최북단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를 이용했다.

    • 개는 땀을 흘리지 않고 말은 땀을 흘린다. 땀은 극지방의 맹추위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 버리므로 동상의 위험이 크다.
    • 개는 털이 무성하지만 말은 갈기를 제외하고는 털이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매우 짧다. 따라서 털이 두둑한 개썰매용 개들은 영하 40도에서도 알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말은 담요를 씌워주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
    • 조랑말은 200kg이 넘기 때문에 크레바스에 빠지면 구출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개는 20~30kg 정도라 한두 마리가 빠지면 사람 한두 명만으로도 충분히 구해낼 수 있다.
    • 개는 잡식이라 먹이를 사람과 공유할 수 있지만, 말은 사람이 먹지 못하는 건초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게다가 건초를 먹인 말에게는 얼음 녹인 물을 충분히 급여해야 한다.

     

    결국 말들은 거의 모두가 얼어죽었고, 설상차도 죄다 작동이 멈춰버렸으며,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한 마리의 조랑말도 훗날 비어드모어 빙하라 불리는[7] 험준한 빙하를 넘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기에 탐험대원들은 생필품을 실은 썰매를 직접 끌어야 했다. 그렇게 빙하를 넘어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결국에는 식량 부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8] 이 때 섀클턴의 탐험대가 도달했던 지점은 남위 88도 23분 지점으로 조금만 더 갔다면 남극점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탐험을 강행했다면 굶어죽을 게 뻔했다.

     

    이에 섀클턴은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식량 부족과 추위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래도 섀클턴의 탐험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이는 극지 탐험에서 실로 드문 일이었기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와 훈장을 받았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Better a live donkey than a dead lion).[9]

    출처 입력

     

    이 말은 돌아오면서 했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하던 말이었다.

     

    한편, 스콧은 섀클턴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열폭했는데 앞서 맥머도 만의 우선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섀클턴을 비난하고 싶었지만 이미 섀클턴이 영웅이 된 터라 언급도 못했다. 그러면서 섀클턴의 다음 도전은 반드시 성공할 거란 생각에 초조해져 이번에야말로 남극점을 자신이 정복하겠다며 남극으로 떠나지만 그 탐험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자세한 과정은 로버트 스콧, 아문센 vs. 스콧 문서로.

     

    그러나 섀클턴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계기가 된 탐험은 따로 있었다.

    2.4. 남극 횡단 도전, 위대한 실패[편집]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5. 말년[편집]


    1922년 섀클턴은 로웨스와 같이 남극 탐험대를 이뤄 퀘스트 호를 타고 원정을 떠났지만 사우스조지아의 그리트비컨(Grytviken)에서 쓰러져 앓다가 죽었다. 여행경비를 만들기 위하여 고생하며 얻은 스트레스와 여러 가지로 인한 과로가 큰 원인이라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영국 남극 탐험대의 베테랑이었던 레너드 허시(Leonard Hussey)[10]가 섀클턴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가는 데 자원했고, 영국을 향해 가던 중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머물렀다. 이 때 섀클턴을 사우스조지아에 묻어달라는 새클턴의 부인 에밀리의 전보가 왔고, 허시는 섀클턴의 시신을 가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돌아와 간단히 예배를 치른 후 그리트비컨의 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묘지 향년 만 47세였다.

     

    사망했을 때 빚 4만 파운드[11]를 남겼지만, 그의 생애를 다룬 책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삶(The Life of Sir Ernest Shackleton)'이 출판되고 섀클턴 기념 기금이 조성되어 부인과 자녀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섀클턴의 실패담은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대원을 살렸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에는 로버트 스콧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20세기 말 그의 위대함은 재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99년에 영국 BBC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했던 탐험가 순위 5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이 순위는 스콧보다 위다.[12]

     

    2011년 8월 30일, 섀클턴이 갖고 있던 비스킷이 230만 원에 팔렸다. 관련 링크를 보면 이 비스킷이 왜 고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족으로 100년이 넘은 비스킷이 왜 썩지 않았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하드택 문서를 볼 것. 아마 식용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 기타[편집]


    •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자신이 극지 탐험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는 로알 아문센, 로버트 스콧, 섀클턴 모두와 같이 일해본 사람이다. 아래가 바로 그 발언이다. 다른 둘(아문센, 섀클턴)에 비해 스콧은 탐험대 대장으로썬 확실히 영 좋지 않은 인물이긴 했지만[13] 그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원들을 의도적으로 낙오시키는 짓까진 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다 죽었다는 게 문제.

    과학적 리더쉽이 필요하면 스콧을 부를 것이다. 신속한 정복을 원하면 아문센을 불러라.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14]

    출처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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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크 와일드(1873~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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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11월 27일, 섀클턴 탐험대의 부대장이었던 프랭크 와일드의 재가 섀클턴의 묘 오른쪽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섀클턴의 오른팔(Shackleton's right-hand man)이라는 글이 새겨졌으며, 그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되었다. 와일드는 섀클턴이 죽은 뒤로 남아공으로 이민가서 농장을 하면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는데 늘그막에 누군가가 섀클턴에 대하여 질문하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섀클턴의 비스킷을 받은 주인공이기도 한데, 배고파 지쳐 있던 그에게 섀클턴이 '자신은 아직 버틸 만하다'며 가지고 있던 비스킷을 내줬다고.#관련기사 (문화일보)
    • 2016년 10월에 톰 하디 주연으로 전기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20년 2월에 재차 보도가 되었지만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하여 연기되었거나 아예 취소된 듯 하다. 2022년에 나온다는 이야기12도 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니 기다려 봐야 할 듯.
    •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중에 이 사람의 성을 딴 "섀클턴"이 있다. 1907년 님로드 호를 몰고 간 두 번째 남극탐험에는 맥킨레이(Mackinlay) 사의 올드 스카치 위스키 25상자가 실려 있었다. 그 중 다섯 상자를 베이스 캠프까지 가지고 가서 묻어두었는데, 남극점 정복이 실패하고 철수하면서 이 위스키는 회수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 위스키 상자는 잊혀졌는데, 19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위스키 제조법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15] 그러다 섀클턴의 기록에서 베이스 캠프에 이 위스키를 묻었다는 기록이 발굴되었고, 탐사 100주년이 되는 2007년 화이트 앤 맥케이 사는 술꾼들을 그러모아 위스키 발굴 원정대를 꾸려서 남극의 얼음 속에 묻힌 이 위스키 상자를 찾아냈다. 놀랍게도 100년간 얼음 속에 묻혀 있던 위스키였지만 11병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맥킨레이를 인수한 화이트 앤 맥캐이(Whyte & Mackay) 사[16]는 이 위스키를 토대로 옛날의 제조법을 복원하고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을 따서 재출시하게 된다. 건빠이 건빠이 그런데 시음평은 숙취 없다는 것 빼곤 그닥 좋지 않았다는 듯.
    • 2016년 12월 현대자동차에서 글로벌 브랜드 캠페인으로 탑기어,[17] 아르틱 트럭스[18] 등과 협력하여 양산차인 2016년식 싼타페[19]를 이용한 남극 횡단에 도전해 성공했는데 이때 싼타페의 운전자로 참가한 패트릭 버겔[20]은 섀클턴의 외증손자로, 외증조부의 염원을 100년만에 이뤄낸 셈이다. 이 때 동원된 차량은 버겔이 몬 싼타페와 물자 수송용 차량 3대로 총 4대, 인원은 버겔 및 안내원 1명, 차량 정비팀 4명, 영상 제작팀 5명 등 총 11명이었고, 코스는 유니언 빙하~남극점~맥머도 만[21]이었다.#관련기사 영상은 티저 "Shackleton's Return Teaser"(14초), 본편 "Shackleton's Return"(5분 13초),[22] 메이킹 필름 "Behind The Scenes: Shackleton’s Return"(4분 42초)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23] Hyundai “Shackleton's Return”- Main film(페이스북판. 유튜브판과 내용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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